약현성당과 명동성당 [더 라이프이스트-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 이야기]

입력 2023-09-15 17:10   수정 2023-09-18 11:42

15, 중림동 약현성당


중림동의 대표적인 건물은 누가 뭐래도 약현성당이다. 성당의 정확한 이름은 ‘중림동 약현 성당’이다. ‘약현성당’이라고 해도 되고 ‘중림동성당’이라고 해도 될 텐데 중림동이라는 근대의 행정동명과 약현이라는 조선시대의 지명을 같이 붙인 것은 성당이 위치한 지역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성당의 지역 사랑이랄까?

신문사에서 일할 때,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직원들과 성당에 들러 차를 마셨다. 성당은 번잡하지 않아서 잠깐의 머뭄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식사 후 북적이는 카페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 맛도 모르는 커피를 들이켜고 부리나케 일터로 복귀하는 것이 대부분 직장인들의 점심 시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동네 직장인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다. 성당의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자판기 커피 한잔을 뽑아 들고 마음을 식히자. 복잡한 일상사, 꼬였던 일들이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안 풀리면 또 어떠랴. 언제 우리 인생에 뜻대로 되는 일이 있었던가. 성당의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운동 한 셈 치자.

성당에 들어서면 왼쪽 언덕에 예수님의 행적을 묵상하며 오르는 좁은 계단이 있다. 십자가의 길이다. 그 길에 올라서면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올라 갈수록 보이는 것은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내 자신이다. 정약용의 조카이자 정약종의 아들인 정하성도 갓 쓴 차림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200년 전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 그의 넉넉한 품이 참 좋다.


언덕 위 작은 전망대에 오르면, 이곳이 성문 밖 첫 동네, 교통의 요지라는 것을 실감한다. 숭례문이 눈 앞에 있다. 숭례문에서 봉래동과 염천교를 지나면 코너에 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좌회전해 만리동 옛길을 지나면 마포나루이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황해도로 수학여행을 갔다고 한다. 청파동으로 빠지면 용산 지나 노량진이다. 이 길은 수원 화성을 행차하던 정조 대왕이 지나간 길이다. 노량진에서 주교(舟橋,배다리)를 놓아 한강을 건넜다.
성당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아현 고개를 지나 신촌, 양화진으로 간다. 물길이 도로로 대체됐고 길의 폭이 넓어졌을 뿐, 자세히 보면 옛길 그대로이다.

작은 전망대를 지나 성당에 이르면 명동성당보다 6년 먼저, 1892년에 지어졌다는 안내판이 나온다. 1886년 조선 정부는 프랑스와 수교했다. 종현, 지금의 명동에 성당을 지으려 했으나 우뚝 솟은 성당이 궁성을 내려다본다는 이유와 풍수지리로 인해 조선정부가 성당 건축을 막았다. 지체되는 사이 이곳에 먼저 성당이 지어진 것이다.

명동성당을 지은 코스트(Coste,Eugene Jean Georges,고의선) 신부가 약현성당을 설계했다. 중세에는 ‘건축가’라는 직업군이 없어서 신부들이 성당을 많이 지었다. 심지어 신학교에서 신부들에게 건축을 가르쳤다.

이 성당은 처음에는 ‘명동성당’에 소속된 하나의 공소로 출발했다. 문밖 공소, 약현 공소라 했다.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작은 미사처이다. 그런데 명동성당보다 이곳이 신자가 많아졌다. 성문 밖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천주교 전파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1887년에 남문 밖 수렛골에 집 한 채를 마련해 교리 강습을 하다 1891년 10월, 수백 명이 참수된 처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아담한 서양식 성당을 지어 서울대교구의 두 번째 본당이 되었다. 그 뒤부터 종현(명동)성당을 ‘문안성당’, 이곳을 ‘문밖성당’이라 했다. 약현성당은 강화는 물론 황해도까지 담당했다.

성당이 지어질 때 두 명의 신자가 힘을 쏟았다. 터를 매입한 사람은 김성흠이다. 외국인이 조선의 건물과 땅을 소유할 수가 없어서 김성흠이라는 신자 명의로 터를 샀다. 서양식 건물을 본 사람도 없고, 서양식 건물을 지어본 기술자도 없는 시절이었다. 문제는 성당 건축에 쓰일 붉은 벽돌의 공급이었다. 김흥민 신도는 용산 한강 연와소(煉瓦所), 한옥 기와를 굽는 곳에서 벽돌을 구워 건축가 코스트에게 보이고 적합판정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연와소를 매입해 성당 건축에 쓰일 벽돌을 공급했다고 한다.

축성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이제 서울 문밖 중심에 성당이 우뚝 솟았다. 그것은 아담하며 또한 성당 다운 성당으로 한국 최초이고 유일하다.”

그래서 약현성당은 명동성당보다 6년이나 먼저 지어질 수 있었다. 명동에 명동성당이 있다면 중림동에는 약현성당이 있다. 여기에는 성모마리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곳의 수호신이라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상’도 있다. 그리고 고난 받으신 예수님도, 정하성도…아담한 성당이지만 명동성당 못지않다. 이곳에서 쉬는 직장인들, 결혼식을 올리는 신혼부부들, 우리에게는 중림동 약현성당이 있다. 자신감을 갖자.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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